이정환 재료연구소 소장
일본 정부의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제조용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형태의 한일 간 무역 갈등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 조짐도 보인다. 우리 정부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핵심 소재, 부품의 수급 방안 및 장기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관계된 산업체뿐만 아니라 연구계와 대책마련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언론이 앞장서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근원적인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여념이 없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주력산업에서 사용하는 핵심 소재, 부품을 일본에 대부분 의존해서 사업을 해 온 대기업 책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가 초연결 사회로 나아가는 21세기 산업 환경에서 모든 소재, 부품의 국산화를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주장일 수가 있다. 극한의 경쟁이 일어나는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과 가격이 떨어지는 자국 제품을 고집하는 사례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의 기초과학 홀대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쓴 소리를 한다. 안타깝지만 국가과학기술 육성이 장기적인 비전에 따라 진행되기보다는 정부의 변화에 따라 너무 자주 바뀐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중추역할을 해야 할 출연연구소도 유망한 과학기술분야에 꾸준한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실적 창출 위주로 운영된 측면이 없지 않다. 정부가 최근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속 출연연구소의 역할과 책임(role and responsibility)을 재정립하고 국가 과학기술의 백년대계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차에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규제 사태가 벌어져 만시지탄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이 추가적으로 규제 품목을 최대 1000여 개까지 늘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이번 사태가 한 달째가 되는 광복절을 기점으로 일본이 규제의 강도를 더욱 높일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더해져 우리 국민들의 감정적인 대응을 자극하고 있는 형세다.
하지만, 현재 산업구조에서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맞대응할 경우 양국이 모두 피해를 입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일본이 지금 취하는 무역규제는 국제법적으로나 산업계 관례로도 극히 이례적인 것으로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이 어려운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에 미국이 자국 이익에 우선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후 21세기에 들어오면서 기세를 드높이던 글로벌화의 동력이 꺼지며 국가 간의 교역이 급격히 줄어드는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sation)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경제학자들 사이에 나오고 있는 형국에 정치적 이익을 위해 경제를 이용하는 무모한 시도가 일어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일본 경제 산업성은 지난 1일 한국으로의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해 스마트폰 및 TV에 사용되는 반도체 등의 제조과정에 필요한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딜라이트 샵 모습(사진 저작권자(c) 연합뉴스)
이번에 문제가 된 소재, 부품을 다른 국가에서 수입하는 방안은 단기적으로 급한 불을 끄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산업체나 국가 차원에서 위기 상황을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안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키워 외교 문제가 산업분야에 영향을 미쳐 국가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 과학기술 연구계가 해야 할 임무로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원천기술개발과 산업기술 경쟁력 강화라는 역할을 목표로 두가지 갈래의 연구개발에 투자를 해오고 있었다. 그간의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의 혁신적인 성과가 창출되지 않고 있다고 R&D 투자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원천기술을 산업화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기술적 죽음의 계곡(technical death valley)을 돌파하는 연구에 대한 보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주력산업과 미래성장동력 산업이 요구하는 소재, 부품의 요구가 관련분야 기초연구자들에게 세부적으로 제시돼 기초, 응용, 상용화 단계 등 서로 다른 기술단계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이 같은 목표를 보고 합심해 뛰어갈 수 있는 연구체계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은 소재를 개발해도 대기업이 써 주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고 대기업은 쓸 만한 소재는 국내에서 구입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많이 듣는다. 소재 분야 연구자들은 소재 핵심 성능 향상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개발된 소재가 시스템에 적용되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요건들은 시스템을 담당하는 대기업이 해결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대기업이 맡고 있는 시스템이나 최종 제품 분야에서는 새로운 소재를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안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기술 선진국에 비해 R&D 역사가 짧았고 수출중심의 경제 구조로 인해 빠른 성과창출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예상되는 핵심소재 개발이 쉽지 않았다.
많은 누리꾼들은 ‘기해왜란’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시작했다고 분노하며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반격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개방과 개혁을 이끈 덩샤오핑이 중국민들에 강조한 ‘도광양회’(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의 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축구에서 골키퍼, 미드필더, 포워드의 역할이 구분되듯이 연구분야에서는 대학, 연구소, 기업은 각 기술개발 단계의 고유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취약했던 기술단계별로 나뉘어진 연구 목표의 초점을 맞추고 대학, 연구소, 기업의 연구자들이 소통하고 협력하면 전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핵심소재를 빠른 시간내에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근본적으로 R&D는 미지의 목표에 대한 매우 위험한 투자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높은 위험에 상응하는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분야이고 변화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유일한 생존 수단이다. 우리나라 R&D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술적 죽음의 계곡을 넘어서는 다리가 필요하다. 출연연구소는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을 잇고, 대학의 기초연구와 기업의 상용화 연구를 이어주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집단으로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